'철학하기'에 해당되는 글 4건
2005/01/25 22:58
[철학하기]
0/
최근 생활에 쫓기다 보니 업무 이외에 PC를 사용하는 일이 거의 없다. 관심을 접은 며칠 사이에 하나의 주제로 꽤나 많은 글들이 포스팅되어 있어 눈길을 끌었다. 쟁점에서는 약간 벗어난 내용이지만 중요한 문제라 생각되기에 적어본다.
1/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다음 RSS넷 거부 운동’에 참여하는 논리에 반대한다.
나는 Daum을 지지하고자 함이 아니라 Rss넷 거부운동에 숨어 있는 퇴행적인 논리를 지적하고자 한다.(Rss넷 서비스는 유저들의 편의를 도모했다는 점에서 긍정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거대 포탈의 횡포를 비판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지적 재산권’에 대한 낯익은 옹호로 퇴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때 전자책 회사에 근무했을 때, ‘지적 재산권’으로 밥을 먹게 되면서 언제나 정신분열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독점할 수 없는 대상인 ‘지식’에 대해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가?)
블로그에 포스팅된 글과 이미지는 개인의 노동이 들어간 지적 생산물이다. 당연히 생산자는 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따라서 생산자와 ‘협의’ 없이 이를 변형, 가공, 왜곡하는 것에는 마찰이 생길 수 있다. 또한 생산자가 공개하기를 꺼려 하는 글의 경우에 유통 자체가 문제될 수도 있다.
그러나 블로그에 공개 포스팅한 ‘내 글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읽는 것’을 거부한다는 논리는 번지수를 잘 못 찾은 이야기로 보인다.
게시물을 공개할 경우 불특정 다수에게 자동으로 노출되는 블로그의 속성을 거부한다면, 굳이 Rss 기능을 제공하는 블로그에 포스팅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는 게시물을 통해 횡단과 교통이 가능하게 하는 블로그의 강한 장점을 퇴색시키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3/
근대 이후의 생산물에 대한 소유권의 지배적인 개념은 “유일무이의 존재인 한 개인에게 귀속되어 본인을 제외한 모든 인류에게 배타적인 권리”였다.
누구의 소유도 아닌 ‘자연물’에 대해 자신의 노동을 기입함으로써 자신을 제외한 전인류로부터 배타적인 ‘소유권’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전에 지적재산권에 대해 쓰다 만 글
그러나 이러한 소유권의 개념은 개인들에게 더 많은 권리들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 지적 생산물에 접근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실제로 이러한 소유권 개념에 기반한 지적재산권 강화의 논리가 생산자들의 권리를 확장시키는 것은 아니다. 최근 개정된 저작권법으로 음원생산자들의 권리가 확장되리라 생각하는가?
거부를 표현하는 많은 이들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게시물이 읽힌다는 점을 강조한다. 심지어는 Rss넷을 통한 구독을 거부하라고 경고까지 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다음 RSS넷 거부 운동’이 지배적인 소유권 개념에 기반해 자신의 게시물에 대한 통제권만을 강조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4/
‘지적 생산물’은 그 속성상 널리 공유될수록 가치 있는 생산물이 된다. 종이로 만든 책에서부터 비트화 된 소프트웨어까지 이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용했을 때 더욱 의미 있는 생산물이 된다.
난 게시물에 대한 개인들의 소유권을 기각해 버리자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생산된 지적 생산물에 대한 장벽을 허물고 제한없는 교통과 횡단이 가능하도록 노력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Rss리더기는 그를 위한 유용한 수단이며, Rss넷은 기능이 보완되어야 할 하나의 서비스일 뿐이다.
나는 Rss넷이 여러 미흡한 측면을 보완한다면 유저들의 입장에서 매우 좋은 서비스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컨데 게시물의 생산자를 표시-링크해주는 것은 인터넷 상에서의 교류를 활성화시키는 수단으로서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이런 방식으로 보완해 가는 것이 훨씬 생산적인 방식이라는 생각이다.
최근 생활에 쫓기다 보니 업무 이외에 PC를 사용하는 일이 거의 없다. 관심을 접은 며칠 사이에 하나의 주제로 꽤나 많은 글들이 포스팅되어 있어 눈길을 끌었다. 쟁점에서는 약간 벗어난 내용이지만 중요한 문제라 생각되기에 적어본다.
1/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다음 RSS넷 거부 운동’에 참여하는 논리에 반대한다.
나는 Daum을 지지하고자 함이 아니라 Rss넷 거부운동에 숨어 있는 퇴행적인 논리를 지적하고자 한다.(Rss넷 서비스는 유저들의 편의를 도모했다는 점에서 긍정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거대 포탈의 횡포를 비판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지적 재산권’에 대한 낯익은 옹호로 퇴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때 전자책 회사에 근무했을 때, ‘지적 재산권’으로 밥을 먹게 되면서 언제나 정신분열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독점할 수 없는 대상인 ‘지식’에 대해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가?)
블로그에 포스팅된 글과 이미지는 개인의 노동이 들어간 지적 생산물이다. 당연히 생산자는 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따라서 생산자와 ‘협의’ 없이 이를 변형, 가공, 왜곡하는 것에는 마찰이 생길 수 있다. 또한 생산자가 공개하기를 꺼려 하는 글의 경우에 유통 자체가 문제될 수도 있다.
그러나 블로그에 공개 포스팅한 ‘내 글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읽는 것’을 거부한다는 논리는 번지수를 잘 못 찾은 이야기로 보인다.
게시물을 공개할 경우 불특정 다수에게 자동으로 노출되는 블로그의 속성을 거부한다면, 굳이 Rss 기능을 제공하는 블로그에 포스팅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는 게시물을 통해 횡단과 교통이 가능하게 하는 블로그의 강한 장점을 퇴색시키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3/
근대 이후의 생산물에 대한 소유권의 지배적인 개념은 “유일무이의 존재인 한 개인에게 귀속되어 본인을 제외한 모든 인류에게 배타적인 권리”였다.
누구의 소유도 아닌 ‘자연물’에 대해 자신의 노동을 기입함으로써 자신을 제외한 전인류로부터 배타적인 ‘소유권’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more.. 소유권 개념에 대한 주석
전에 지적재산권에 대해 쓰다 만 글
그러나 이러한 소유권의 개념은 개인들에게 더 많은 권리들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 지적 생산물에 접근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실제로 이러한 소유권 개념에 기반한 지적재산권 강화의 논리가 생산자들의 권리를 확장시키는 것은 아니다. 최근 개정된 저작권법으로 음원생산자들의 권리가 확장되리라 생각하는가?
거부를 표현하는 많은 이들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게시물이 읽힌다는 점을 강조한다. 심지어는 Rss넷을 통한 구독을 거부하라고 경고까지 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다음 RSS넷 거부 운동’이 지배적인 소유권 개념에 기반해 자신의 게시물에 대한 통제권만을 강조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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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생산물’은 그 속성상 널리 공유될수록 가치 있는 생산물이 된다. 종이로 만든 책에서부터 비트화 된 소프트웨어까지 이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용했을 때 더욱 의미 있는 생산물이 된다.
난 게시물에 대한 개인들의 소유권을 기각해 버리자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생산된 지적 생산물에 대한 장벽을 허물고 제한없는 교통과 횡단이 가능하도록 노력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Rss리더기는 그를 위한 유용한 수단이며, Rss넷은 기능이 보완되어야 할 하나의 서비스일 뿐이다.
나는 Rss넷이 여러 미흡한 측면을 보완한다면 유저들의 입장에서 매우 좋은 서비스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컨데 게시물의 생산자를 표시-링크해주는 것은 인터넷 상에서의 교류를 활성화시키는 수단으로서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이런 방식으로 보완해 가는 것이 훨씬 생산적인 방식이라는 생각이다.
2004/10/22 18:29
[철학하기]
어제 예술가를 위한 인문학 강의 시뮬라크르 시대의 문화론 3강 '이미지 복제에서 원본 없는 이미지로'에 다녀왔습니다.
심혜련 선생님의 강의가 있었지요. 벤야민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10분전에 들어갔는데도 꽉차서 뒤에 간이 의자에 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료강좌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더라구요...
시각 이미지를 주로 다루었는데, 요약하면 기술 재생산 시대의 작품, 즉 매체의 변화가 이미지 접근 가능성의 민주화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의적 가치에서 전시적 가치로 변화했다는 것이죠.
사진과 영화가 그것입니다.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논의이지만 오랜만에 듣는 강의라 집중하며 들었습니다.
벤야민에 대해서는 '아케이드'를 통해 자본주의를 분석했다는 것과 유물론과 종말론을 결합하려 했다는 점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요.
그리고 질문시간이 있었는데, 대개 아우라의 현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여전히 아우라는 존재하는 것 아닌가? 라는 질문들...
다음 주는 디지털 시대의 영상과 이미지 변형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고 합니다.
심혜련 선생님의 강의가 있었지요. 벤야민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10분전에 들어갔는데도 꽉차서 뒤에 간이 의자에 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료강좌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더라구요...
시각 이미지를 주로 다루었는데, 요약하면 기술 재생산 시대의 작품, 즉 매체의 변화가 이미지 접근 가능성의 민주화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의적 가치에서 전시적 가치로 변화했다는 것이죠.
사진과 영화가 그것입니다.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논의이지만 오랜만에 듣는 강의라 집중하며 들었습니다.
벤야민에 대해서는 '아케이드'를 통해 자본주의를 분석했다는 것과 유물론과 종말론을 결합하려 했다는 점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요.
그리고 질문시간이 있었는데, 대개 아우라의 현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여전히 아우라는 존재하는 것 아닌가? 라는 질문들...
다음 주는 디지털 시대의 영상과 이미지 변형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고 합니다.
2004/10/14 14:48
[철학하기]
전에 '민주주의'와 '정치적 교통-연대' 등을 형상화하기 위해 데리다의 '약속', '환대'의 개념을 빌린 적이 있다. 그때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저서와 번역되지 않은 도서(제목 기억안남)를 몇 장 넘기며 힘겨워했다.(적응안되는 문투만큼이나 프랑스 철학자들의 글을 이해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약속'이나 '환대'는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게 느껴지는 개념이었다. 성경은 '옛 약속'과 '새 약속'으로 되어있으며, 가장 위대한 약속은 '메시아의 구원'이 아니겠는가? '환대' 역시 윤리적 실천의 형상을 갖고 있다.
당시에 데리다로부터 얻은 것은 '민주주의'야말로 인류의 가장 위대한 '약속'이라는 것이다. 그 뒤로 데리다 읽기를 엄두도 못 내었는데...
값진 이론적 실천을 벌여온 한 철학자의 명복을 빌어본다.
아래는 최원씨 홈페이지에서 퍼옴.
----------------------
고 자크 데리다 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이 갑작스런 죽음에 도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몰라서 이제껏 아무말도 못하고 조용히 있었는데, 어떤 분이 고맙게도 저에게 발리바르 선생의 추모사를 보내주셨습니다. 원래 글은 l'humanité에 실려 있습니다(http://www.radio-universfm.com/lapens%C3%A9e.htm 에는 또 다른 추모사들이 있습니다). 제가 급하게 대충 번역해 봤습니다. 혹시 오역을 찾으시면 지적해주셨으면 합니다.
(처음 게시한 후에 약간 수정을 했습니다.)
À bientôt, Jacques Derrida
곧 만납시다, 자크 데리다.
par Étienne Balibar
philosphe.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
Quelques heures après la disparition de Jacques Derrida, je ne veux pas tenter de caractériser son oeuvre en quelques mots. Je veux encore moins l’enfermer dans une étiquette. Seulement me remémorer quelques moments d’une vie et d’une pensée que j’ai eu la chance de rencontrer comme élève, collègue et ami.
자크 데리다가 사라진지 몇 시간이 안된 지금 나는 그의 작업을 몇 마디 말로 규정하려고 시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그것을 하나의 명칭 안에 가두어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지 학생으로, 동료로, 친구로서 만날 수 있었던 삶과 생각의 몇몇 순간들을 회상하고 싶을 뿐입니다.
Je me souviens de son arrivée à l’École normale supérieure, où nous préparions l’agrégation. Précédé de sa réputation de « meilleur phénoménologue de France », Derrida était surtout, pour nous, l’auteur d’un essai éblouissant sur l’origine de la géométrie de Husserl, dans lequel la question de l’historicité de la vérité était arrachée aux débats entre le sociologisme et le psychologisme. Il y allait d’emblée au plus difficile : la question des conditions de possibilité de la démonstration, en la faisant passer d’un problème de garantie formelle à un problème de reproduction dans le temps, anticipant sa grande thématique de la « trace », ou de la connexion entre l’activité de la pensée et la matérialité de l’écriture. Ses cours étaient - éloquents, mais surtout rigoureux dans l’établissement des concepts et la lecture des textes (comme ils le resteront toujours, il suffit de lire Politiques de l’amitié). Je découvris des années plus tard que j’en avais mémorisé des développements entiers grâce à la clarté et à la force de ses interprétations.
저는 그가 고등사범학교에 도착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교수자격시험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데리다는 우리에게 “프랑스의 더 나은 현상학자”라는 그의 명성에 앞서, 무엇보다도 후설의 <기하학의 기원>에 관한 눈부신 에세이의 저자였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역사성과 진리의 질문을 사회학주의와 심리학주의 사이의 논쟁에서 빼앗아 왔습니다. 그는 곧바로 가장 어려운 곳으로 갔습니다. 증명 가능성의 조건들이라는 질문—이를 형식적 보증이라는 문제로부터 시간 속에서의 재생산이라는 문제(“흔적”이라는 그의 위대한 테마를 예상하는)로 이행하게 만들면서—이나 기록/글쓰기의 활동과 사고와 물질성 간의 연결이라는 질문 말입니다. 그의 강의들은 웅변적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개념들의 성립과 텍스트 읽기에 있어 엄격했습니다(이 강의들이 항상 참으로 그렇게 남아있으리라는 것은 <우정의 정치>를 읽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수년 후 저는, 그의 해석의 힘과 명쾌함 덕분에 제가 강의들의 모든 전개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었습니다.
À cette pratique de grand enseignant, je veux rattacher une leçon plus générale. Derrida qui, dans le monde entier, est devenu une figure très médiatique, n’a jamais cessé de travailler dans l’université et d’y voir le lieu fondamental de l’activité philosophique (même si, dans son pays du moins, elle ne lui a concédé que chichement la reconnaissance). Par des initiatives telles que les états généraux de la philosophie de 1979, ou la création du Collège international de philosophie en 1983, il a tenté de l’aider à sortir de son carcan hiérarchique, de son exclusivisme disciplinaire et de son nationalisme (d’autant plus stérilisant lorsque, comme en France, il se croit assuré de porter les valeurs « universelles »). Il est vrai que l’université dont il s’agit là est ce que, dans une conférence à Stanford de 1998, il appelle une université sans condition, s’assignant par-delà les frontières et les contrôles du pouvoir, la tâche de repenser tous les travaux humains et d’énoncer le possible (et même l’impossible) à l’époque de la mécanisation et de la mondialisation.
위대한 가르침의 이러한 실천에 저는 더욱 일반적인 교훈을 관련시키고 싶습니다. 세계적으로 상당히 미디어적인 인물이 되어온 데리다는 대학에서 작업하길 결코 멈추지 않았고 철학적 활동의 근본적인 장소를 대학 안에서 보길 멈추지 않았습니다(비록 대학은 그를 단지 초라하게만 인정해 주었을 뿐이며 자기 나라의 대학은 그나마 인색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1979년 철학의회 혹은 1983년 국제철학대의 창설 같은 이니셔티브를 통해 그는 대학이 자신의 위계제적인 굴레와 분과들 사이의 배타주의와 민족주의(이는, 프랑스에서처럼, 스스로 “보편적” 가치들을 담지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민족주의이기 때문에 더더욱 [대학을] 불모로 만드는 민족주의입니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시도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대학이 그가 1998년 스탠포드 컨퍼런스에서 조건 없는 대학이라고 부른 것이라는 점은 사실입니다. 권력의 경계선들과 통제들을 넘어 인간의 모든 노동들을 다시 사고하고 기계화와 세계화의 시대에 가능한 것을 (그리고 심지어 불가능한 것을) 발언하는 과제를 떠맡는 대학 말입니다.
Je me souviens de la publication en 1967 des trois manifestes de cette nouvelle méthode qu’on appellerait plus tard la « déconstruction » : la Voix et le Phénomène, De la grammatologie, l’Écriture et la Différence, et de leurs subtils croisements entre philosophie et littérature. Je me souviens des grandes controverses avec Lévi-Strauss sur la lecture de Rousseau, avec Foucault sur celle de Descartes, qu’on peut relire aujourd’hui comme autant de « querelles » fondatrices du structuralisme philosophique, où se joue sa démarcation avec la métaphysique et, déjà, la virtualité de sa transformation en un « post-structuralisme ». C’est-à-dire en une critique interne de l’idée de structure (en particulier de sa prétention à représenter des « totalités »). Cette critique, toutefois, ne se fait pas du point de vue de l’humanisme ou de la liberté du sujet, mais du point de vue des différences qui compliquent notre idée de l’homme (donc des « fins de l’homme » et de ses droits), et en soulignent l’ambivalence : la conscience et l’inconscient, le corps et la lettre, le masculin et le féminin (et le neutre). Car, elles comportent toutes un excédent irréductible aux oppositions binaires, formelles. Un tel excédent de sens (qu’il appelle le « supplément d’origine ») ouvre aussi bien à la violence des mécanismes identitaires et des stratégies d’appropriation du monde qu’au recommencement et à la multiplication des interprétations. On trouvera là le germe des grands thèmes de sa maturité, en particulier sa conception de l’événement comme un « à venir » incalculable, dans lequel la responsabilité individuelle ou collective est portée à l’extrême, non parce que nous serions capables de maîtriser « performativement » les conséquences de nos actes et de nos paroles, mais parce que nous savons déjà qu’ils entraîneront à l’infini la relance et la reformulation du problème du droit et de la justice.
저는 사람들이 이후 “해체”라고 부를 이 새로운 방법론에 관한 세 가지 선언인 <목소리와 현상>, <기록학에 관하여>, <기록과 차이>의 1967년 출판 및 이들의 철학과 문학 사이에서의 미묘한 교차들을 기억합니다. 저는 [그가 행한] 루소의 독해에 관한 레비-스트로스와의 논쟁, 데카르트에 관한 푸코와의 논쟁 같은 대논쟁들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이를 오늘 다시 그만큼의 철학적 구조주의의 근본적인 논쟁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철학적 구조주의는 형이상학과 자신의 구별을 행하고, 따라서 이미 자신을 “후기-구조주의”로 전화시킬 잠재성, 즉 자신을 구조라는 관념(특히 구조가 “총체성”들을 표상한다는 주장/오만)의 내적인 비판으로 전화시킬 잠재성을 유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휴머니즘의 관점이나 주체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행해지지 않고 인간에 관한(따라서 “인간의 목적들”과 권리들에 관한) 우리의 관념을 복잡하게 만들고 그것의 양가성(의식과 무의식, 육체와 정신,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과 중성적인 것))을 강조하는 차이들이라는 관점에서 행해집니다. 왜냐하면, 차이들은 모두 이원론적 대립들로 환원할 수 없는 초과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의미의 이 같은 초과(데리다가 “기원적 보충-대체”라고 부르는)는 해석의 재개와 증식 뿐 아니라 동일성의 기계주의의 폭력과 세계 전유의 전술들로 향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데리다의 성숙기의 위대한 테마들, 특히 계산 불가능한 “도래할 것”으로서의 사건이라는 인식의 맹아를 봅니다—이 사건이라는 인식 안에서는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책임성이 극단화되는데, 이는 우리가 우리의 행위와 발언의 결과들을 “수행적으로” 지배/제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행위와 발언이 무한히 권리와 정의라는 문제의 재활성화 및 재정식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Enfin je me souviens de toutes les circonstances dans lesquelles - depuis le secours aux intellectuels « dissidents » de Tchécoslovaquie au sein de l’association Jan Hus jusqu’aux prises de position pour les droits du peuple palestinien et la réconciliation entre les adversaires dans le conflit israélo-palestinien, en passant par la défense du droit d’asile en Europe contre les politiques sécuritaires et la stigmatisation des « étrangers », j’en passe évidemment - nous avons tenté de contribuer, en tant qu’intellectuels sans attaches sinon sans engagements, à l’émergence de ce qu’il a appelé un « nouvel internationalisme ». Non pas que nous ayons toujours été entièrement d’accord dans nos analyses et dans nos références historiques. Mais, là encore avec beaucoup d’autres, et souvent à son initiative, nous avons partagé la conviction que les intellectuels et les artistes ont un rôle propre à jouer dans la constitution d’une résistance multiforme et multipolaire à l’emprise des souverainetés d’État ou de marché qui engendrent la violence de masse et s’en nourrissent en retour. Ce qui passe par la déconstruction de leurs discours et par le dialogue constructif entre leurs adversaires (comme il venait d’en donner l’exemple en joignant ses forces avec celles de son vieil « ennemi » Habermas pour démonter la machine de propagande de la guerre sans fin contre le terrorisme et les « États voyous »).
마지막으로 저는 우리가, 참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소속이 없는 지성인들로서, 그가 “새로운 국제주의”라고 불렀던 것의 출현에 기여하고자 시도했던 그 모든 상황들(얀 후스 연대의 한복판에서의 체코슬로바키아의 “반역적” 지성인들에 대한 원조에서 시작해서, “외국인들”에 대한 공안정치와 낙인에 반대하여 유럽에서 피신권을 방어한 일을 지나, 그리고 팔레스타인 인민의 권리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에서 적대자들의 화해를 위한 입장을 표명한 일에 이르기까지, 확실히 저는 이에 관해 대충 지나가고 있습니다)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항상 분석과 역사적 참조에 있어 전적으로 동의했던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여기 또 다른 많은 분들과 함께, 종종 데리다의 주도로, 우리는, 대중의 폭력을 야기하고 그것을 되받아 배양하는 국가와 시장 주권들의 지배력에 대한 다형적이고 다극적인 저항을 구성함에 있어 지성인들과 예술가들이 고유한 역할을 갖는다는 확신을 공유했던 것입니다. 이는 자신들의 담론들의 해체와, 그리고 자신들의 적들/경쟁자들 사이의 건설적인 대화를 통과합니다(데리다는 얼마전에 테러리즘과 “불량배 국가들”에 대한 항구적 전쟁을 선동하는 기계를 분해하기 위해 자신의 오래된 “적”인 하버마스와 힘을 합침으로써, 여기에 실례를 제공했습니다)
Tout cela, qu’il s’agisse de l’avenir de l’université ou de la philosophie de l’« à venir », de la responsabilité des intellectuels et de leur place dans le monde des communications globales, est plus difficile à réfléchir sans sa contribution, mais ne cessera pas de sitôt de chercher des ressources de pensée dans son exemple et ses écrits. Adieu, cher Jacques, ou plutôt à demain.
대학의 도래 혹은 “도래할” 철학, 지성인들의 책임, 지구적 교통의 세계 안에서 그들의 자리의 문제인 이 모든 것은 데리다의 기여 없이는 반성하기 한층 어려운 것입니다만, 이 모든 것은 그의 모범과 글 안에서 사유의 원천들을 구하길 그리 빨리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잘 가요 자크. 아니 차라리, 곧 만납시다.
'약속'이나 '환대'는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게 느껴지는 개념이었다. 성경은 '옛 약속'과 '새 약속'으로 되어있으며, 가장 위대한 약속은 '메시아의 구원'이 아니겠는가? '환대' 역시 윤리적 실천의 형상을 갖고 있다.
당시에 데리다로부터 얻은 것은 '민주주의'야말로 인류의 가장 위대한 '약속'이라는 것이다. 그 뒤로 데리다 읽기를 엄두도 못 내었는데...
값진 이론적 실천을 벌여온 한 철학자의 명복을 빌어본다.
아래는 최원씨 홈페이지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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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자크 데리다 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이 갑작스런 죽음에 도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몰라서 이제껏 아무말도 못하고 조용히 있었는데, 어떤 분이 고맙게도 저에게 발리바르 선생의 추모사를 보내주셨습니다. 원래 글은 l'humanité에 실려 있습니다(http://www.radio-universfm.com/lapens%C3%A9e.htm 에는 또 다른 추모사들이 있습니다). 제가 급하게 대충 번역해 봤습니다. 혹시 오역을 찾으시면 지적해주셨으면 합니다.
(처음 게시한 후에 약간 수정을 했습니다.)
À bientôt, Jacques Derrida
곧 만납시다, 자크 데리다.
par Étienne Balibar
philosphe.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
Quelques heures après la disparition de Jacques Derrida, je ne veux pas tenter de caractériser son oeuvre en quelques mots. Je veux encore moins l’enfermer dans une étiquette. Seulement me remémorer quelques moments d’une vie et d’une pensée que j’ai eu la chance de rencontrer comme élève, collègue et ami.
자크 데리다가 사라진지 몇 시간이 안된 지금 나는 그의 작업을 몇 마디 말로 규정하려고 시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그것을 하나의 명칭 안에 가두어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지 학생으로, 동료로, 친구로서 만날 수 있었던 삶과 생각의 몇몇 순간들을 회상하고 싶을 뿐입니다.
Je me souviens de son arrivée à l’École normale supérieure, où nous préparions l’agrégation. Précédé de sa réputation de « meilleur phénoménologue de France », Derrida était surtout, pour nous, l’auteur d’un essai éblouissant sur l’origine de la géométrie de Husserl, dans lequel la question de l’historicité de la vérité était arrachée aux débats entre le sociologisme et le psychologisme. Il y allait d’emblée au plus difficile : la question des conditions de possibilité de la démonstration, en la faisant passer d’un problème de garantie formelle à un problème de reproduction dans le temps, anticipant sa grande thématique de la « trace », ou de la connexion entre l’activité de la pensée et la matérialité de l’écriture. Ses cours étaient - éloquents, mais surtout rigoureux dans l’établissement des concepts et la lecture des textes (comme ils le resteront toujours, il suffit de lire Politiques de l’amitié). Je découvris des années plus tard que j’en avais mémorisé des développements entiers grâce à la clarté et à la force de ses interprétations.
저는 그가 고등사범학교에 도착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교수자격시험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데리다는 우리에게 “프랑스의 더 나은 현상학자”라는 그의 명성에 앞서, 무엇보다도 후설의 <기하학의 기원>에 관한 눈부신 에세이의 저자였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역사성과 진리의 질문을 사회학주의와 심리학주의 사이의 논쟁에서 빼앗아 왔습니다. 그는 곧바로 가장 어려운 곳으로 갔습니다. 증명 가능성의 조건들이라는 질문—이를 형식적 보증이라는 문제로부터 시간 속에서의 재생산이라는 문제(“흔적”이라는 그의 위대한 테마를 예상하는)로 이행하게 만들면서—이나 기록/글쓰기의 활동과 사고와 물질성 간의 연결이라는 질문 말입니다. 그의 강의들은 웅변적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개념들의 성립과 텍스트 읽기에 있어 엄격했습니다(이 강의들이 항상 참으로 그렇게 남아있으리라는 것은 <우정의 정치>를 읽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수년 후 저는, 그의 해석의 힘과 명쾌함 덕분에 제가 강의들의 모든 전개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었습니다.
À cette pratique de grand enseignant, je veux rattacher une leçon plus générale. Derrida qui, dans le monde entier, est devenu une figure très médiatique, n’a jamais cessé de travailler dans l’université et d’y voir le lieu fondamental de l’activité philosophique (même si, dans son pays du moins, elle ne lui a concédé que chichement la reconnaissance). Par des initiatives telles que les états généraux de la philosophie de 1979, ou la création du Collège international de philosophie en 1983, il a tenté de l’aider à sortir de son carcan hiérarchique, de son exclusivisme disciplinaire et de son nationalisme (d’autant plus stérilisant lorsque, comme en France, il se croit assuré de porter les valeurs « universelles »). Il est vrai que l’université dont il s’agit là est ce que, dans une conférence à Stanford de 1998, il appelle une université sans condition, s’assignant par-delà les frontières et les contrôles du pouvoir, la tâche de repenser tous les travaux humains et d’énoncer le possible (et même l’impossible) à l’époque de la mécanisation et de la mondialisation.
위대한 가르침의 이러한 실천에 저는 더욱 일반적인 교훈을 관련시키고 싶습니다. 세계적으로 상당히 미디어적인 인물이 되어온 데리다는 대학에서 작업하길 결코 멈추지 않았고 철학적 활동의 근본적인 장소를 대학 안에서 보길 멈추지 않았습니다(비록 대학은 그를 단지 초라하게만 인정해 주었을 뿐이며 자기 나라의 대학은 그나마 인색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1979년 철학의회 혹은 1983년 국제철학대의 창설 같은 이니셔티브를 통해 그는 대학이 자신의 위계제적인 굴레와 분과들 사이의 배타주의와 민족주의(이는, 프랑스에서처럼, 스스로 “보편적” 가치들을 담지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민족주의이기 때문에 더더욱 [대학을] 불모로 만드는 민족주의입니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시도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대학이 그가 1998년 스탠포드 컨퍼런스에서 조건 없는 대학이라고 부른 것이라는 점은 사실입니다. 권력의 경계선들과 통제들을 넘어 인간의 모든 노동들을 다시 사고하고 기계화와 세계화의 시대에 가능한 것을 (그리고 심지어 불가능한 것을) 발언하는 과제를 떠맡는 대학 말입니다.
Je me souviens de la publication en 1967 des trois manifestes de cette nouvelle méthode qu’on appellerait plus tard la « déconstruction » : la Voix et le Phénomène, De la grammatologie, l’Écriture et la Différence, et de leurs subtils croisements entre philosophie et littérature. Je me souviens des grandes controverses avec Lévi-Strauss sur la lecture de Rousseau, avec Foucault sur celle de Descartes, qu’on peut relire aujourd’hui comme autant de « querelles » fondatrices du structuralisme philosophique, où se joue sa démarcation avec la métaphysique et, déjà, la virtualité de sa transformation en un « post-structuralisme ». C’est-à-dire en une critique interne de l’idée de structure (en particulier de sa prétention à représenter des « totalités »). Cette critique, toutefois, ne se fait pas du point de vue de l’humanisme ou de la liberté du sujet, mais du point de vue des différences qui compliquent notre idée de l’homme (donc des « fins de l’homme » et de ses droits), et en soulignent l’ambivalence : la conscience et l’inconscient, le corps et la lettre, le masculin et le féminin (et le neutre). Car, elles comportent toutes un excédent irréductible aux oppositions binaires, formelles. Un tel excédent de sens (qu’il appelle le « supplément d’origine ») ouvre aussi bien à la violence des mécanismes identitaires et des stratégies d’appropriation du monde qu’au recommencement et à la multiplication des interprétations. On trouvera là le germe des grands thèmes de sa maturité, en particulier sa conception de l’événement comme un « à venir » incalculable, dans lequel la responsabilité individuelle ou collective est portée à l’extrême, non parce que nous serions capables de maîtriser « performativement » les conséquences de nos actes et de nos paroles, mais parce que nous savons déjà qu’ils entraîneront à l’infini la relance et la reformulation du problème du droit et de la justice.
저는 사람들이 이후 “해체”라고 부를 이 새로운 방법론에 관한 세 가지 선언인 <목소리와 현상>, <기록학에 관하여>, <기록과 차이>의 1967년 출판 및 이들의 철학과 문학 사이에서의 미묘한 교차들을 기억합니다. 저는 [그가 행한] 루소의 독해에 관한 레비-스트로스와의 논쟁, 데카르트에 관한 푸코와의 논쟁 같은 대논쟁들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이를 오늘 다시 그만큼의 철학적 구조주의의 근본적인 논쟁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철학적 구조주의는 형이상학과 자신의 구별을 행하고, 따라서 이미 자신을 “후기-구조주의”로 전화시킬 잠재성, 즉 자신을 구조라는 관념(특히 구조가 “총체성”들을 표상한다는 주장/오만)의 내적인 비판으로 전화시킬 잠재성을 유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휴머니즘의 관점이나 주체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행해지지 않고 인간에 관한(따라서 “인간의 목적들”과 권리들에 관한) 우리의 관념을 복잡하게 만들고 그것의 양가성(의식과 무의식, 육체와 정신,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과 중성적인 것))을 강조하는 차이들이라는 관점에서 행해집니다. 왜냐하면, 차이들은 모두 이원론적 대립들로 환원할 수 없는 초과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의미의 이 같은 초과(데리다가 “기원적 보충-대체”라고 부르는)는 해석의 재개와 증식 뿐 아니라 동일성의 기계주의의 폭력과 세계 전유의 전술들로 향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데리다의 성숙기의 위대한 테마들, 특히 계산 불가능한 “도래할 것”으로서의 사건이라는 인식의 맹아를 봅니다—이 사건이라는 인식 안에서는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책임성이 극단화되는데, 이는 우리가 우리의 행위와 발언의 결과들을 “수행적으로” 지배/제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행위와 발언이 무한히 권리와 정의라는 문제의 재활성화 및 재정식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Enfin je me souviens de toutes les circonstances dans lesquelles - depuis le secours aux intellectuels « dissidents » de Tchécoslovaquie au sein de l’association Jan Hus jusqu’aux prises de position pour les droits du peuple palestinien et la réconciliation entre les adversaires dans le conflit israélo-palestinien, en passant par la défense du droit d’asile en Europe contre les politiques sécuritaires et la stigmatisation des « étrangers », j’en passe évidemment - nous avons tenté de contribuer, en tant qu’intellectuels sans attaches sinon sans engagements, à l’émergence de ce qu’il a appelé un « nouvel internationalisme ». Non pas que nous ayons toujours été entièrement d’accord dans nos analyses et dans nos références historiques. Mais, là encore avec beaucoup d’autres, et souvent à son initiative, nous avons partagé la conviction que les intellectuels et les artistes ont un rôle propre à jouer dans la constitution d’une résistance multiforme et multipolaire à l’emprise des souverainetés d’État ou de marché qui engendrent la violence de masse et s’en nourrissent en retour. Ce qui passe par la déconstruction de leurs discours et par le dialogue constructif entre leurs adversaires (comme il venait d’en donner l’exemple en joignant ses forces avec celles de son vieil « ennemi » Habermas pour démonter la machine de propagande de la guerre sans fin contre le terrorisme et les « États voyous »).
마지막으로 저는 우리가, 참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소속이 없는 지성인들로서, 그가 “새로운 국제주의”라고 불렀던 것의 출현에 기여하고자 시도했던 그 모든 상황들(얀 후스 연대의 한복판에서의 체코슬로바키아의 “반역적” 지성인들에 대한 원조에서 시작해서, “외국인들”에 대한 공안정치와 낙인에 반대하여 유럽에서 피신권을 방어한 일을 지나, 그리고 팔레스타인 인민의 권리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에서 적대자들의 화해를 위한 입장을 표명한 일에 이르기까지, 확실히 저는 이에 관해 대충 지나가고 있습니다)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항상 분석과 역사적 참조에 있어 전적으로 동의했던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여기 또 다른 많은 분들과 함께, 종종 데리다의 주도로, 우리는, 대중의 폭력을 야기하고 그것을 되받아 배양하는 국가와 시장 주권들의 지배력에 대한 다형적이고 다극적인 저항을 구성함에 있어 지성인들과 예술가들이 고유한 역할을 갖는다는 확신을 공유했던 것입니다. 이는 자신들의 담론들의 해체와, 그리고 자신들의 적들/경쟁자들 사이의 건설적인 대화를 통과합니다(데리다는 얼마전에 테러리즘과 “불량배 국가들”에 대한 항구적 전쟁을 선동하는 기계를 분해하기 위해 자신의 오래된 “적”인 하버마스와 힘을 합침으로써, 여기에 실례를 제공했습니다)
Tout cela, qu’il s’agisse de l’avenir de l’université ou de la philosophie de l’« à venir », de la responsabilité des intellectuels et de leur place dans le monde des communications globales, est plus difficile à réfléchir sans sa contribution, mais ne cessera pas de sitôt de chercher des ressources de pensée dans son exemple et ses écrits. Adieu, cher Jacques, ou plutôt à demain.
대학의 도래 혹은 “도래할” 철학, 지성인들의 책임, 지구적 교통의 세계 안에서 그들의 자리의 문제인 이 모든 것은 데리다의 기여 없이는 반성하기 한층 어려운 것입니다만, 이 모든 것은 그의 모범과 글 안에서 사유의 원천들을 구하길 그리 빨리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잘 가요 자크. 아니 차라리, 곧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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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buy databases | 2009/11/30 03:51 | DEL
[...] We are totally committed to democracy, to pluralism, to respect for human rights.' Most Jordanians see the King as the best guarantee the country has of stability; hence the concern over his health. Basis,debt He termed threatening to shut down th.. |
2004/10/12 16:50
[철학하기]
이 글은 안달복달님의 [지적재산권 침해죄 친고죄 조항 폐지마라]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계급투쟁은 자본가들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매일 되새기게 하는 군...
지적재산권은 디지털 컨텐츠 관련 업계 종사자로 매 순간 느끼는 정신분열 증세의 원인이 되는 쟁점이다. 98년에 이 문제를 처음 진지하게 접하고 비자본주의적 소유에 대한 가능성을 발견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정보.지식의 교류 이상으로 지적재산권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물론 나는 이 개정안이 대중들로부터 쉽게 찬동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 지적재산권에 대한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는 창작물에 대한 노동을 얼마간 보상해야 한다는 것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안이 통과된다면 그것은 물질성을 획득하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친고죄 규정을 삭제하여 얻는 가장 큰 효과는 '공포'일 것이다. 훈육의 가장 탁월한 방법은 공포이다. 이러한 공포는 자기검열, 심지어는 타인에 대한 감시로 이어진다.
저들이 시비를 걸었으니, 대답을 해야한다.
심지어 우리나라 대법원 판례는 남의 땅을 무단 점유하여 채소를 심으면 채소는 심은 사람의 소유가 된다고 판시하고 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점유사용할 권리없이 그 토지에 무엇인가를 부합시킨 경우 (즉, 나무를 심은 경우, 건물 아닌 공작물을 설치한 경우) 그 토지 소유자의 소유권에 자동귀속된다는 이론과 배치됨에도, 오랫동안 대법원의 입장이 되어 왔다.
- 진보블로그에서 우연히 발견한 글. 안달복달님의 블로그에서 일부 발췌
- 진보블로그에서 우연히 발견한 글. 안달복달님의 블로그에서 일부 발췌
'계급투쟁은 자본가들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매일 되새기게 하는 군...
지적재산권은 디지털 컨텐츠 관련 업계 종사자로 매 순간 느끼는 정신분열 증세의 원인이 되는 쟁점이다. 98년에 이 문제를 처음 진지하게 접하고 비자본주의적 소유에 대한 가능성을 발견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정보.지식의 교류 이상으로 지적재산권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물론 나는 이 개정안이 대중들로부터 쉽게 찬동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 지적재산권에 대한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는 창작물에 대한 노동을 얼마간 보상해야 한다는 것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안이 통과된다면 그것은 물질성을 획득하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친고죄 규정을 삭제하여 얻는 가장 큰 효과는 '공포'일 것이다. 훈육의 가장 탁월한 방법은 공포이다. 이러한 공포는 자기검열, 심지어는 타인에 대한 감시로 이어진다.
저들이 시비를 걸었으니, 대답을 해야한다.


